한달만의 메일링이 되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베네수엘라로 떠나기 전에 메일을 보냈어야하는데, 곧 설명드리겠지만 우여곡절이 많다보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일단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후에는 KT 심카드가 전혀 작동하지 않아, 메일링 서비스인 스티비를 이용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구요. 폰번호로 인증문자를 보내서 그걸 꼭 확인해야 로그인하게 만들어놨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전에 과테말라로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이제서야 소식을 전합니다.
베네수엘라로 가기 위해 콜롬비아의 보고타로 떠났던 것이 지난 1월9일이었습니다. 공항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10일 아침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로 향하기 위해 다시 공항을 찾았죠. 체크인을 하려고 하니 기계에서 에러가 나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제서야 비행기가 캔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찾아보니 마침 제가 베네수엘라로 가는 날이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대통령이 3선 취임식을 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미국과 주변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는 대통령인 그는 자신의 취임식에 무슨 일이 날까 걱정이 되었는지, 그날 아침 기습적으로 콜롬비아와의 국경을 3일간 닫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비행사는 언제 비행기가 뜰지 모른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 처음에는 14일에 다시 국경을 연다니 그때 비행기를 타고 갈까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앙헬 폭포를 촬영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12일에 앙헬 폭포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일주일에 한번만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가 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비행편을 알아봐도 나오는 것이 없어서 그 방법밖에 없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타 시내로 와서 호스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계속 제 비행기를 캔슬한 LATAM 항공사에 연락을 취했는데 저에겐 아무 안내도 없더니 그제서야 말하더군요. 다른 승객들이 이미 앞으로의 비행편을 다 예약해서 23일까지 비행편에 자리가 없다고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항공사도 알아봤지만 보고타에서 카라카스로 가는 비행편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있어서는 해결되는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네수엘라로 갈 수 있는 다른 비행편들을 검색했을때 유일하게 발견한 비행편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보고타에서 마드리드로 가서, 마드리드에서 카라카스로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편의 비행기표값이 합치면 2천불이 되서 이건 도저히 못하겠다 했었죠.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 방법밖에 없겠다 싶더군요. 보고타에 머무르면서 베네수엘라에 가는 기회를 아예 날리느냐, 아니면 2천불을 더 써서 가느냐. 마드리드행 비행기는 4시간후 출발이었습니다. 생각을 오래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저는 가기로 했습니다. 그길로 바로 호스텔을 뛰쳐나와 다시 공항으로 향했고, 보고타에서 2시간이면 갈 카라카스를 20시간이 넘게 걸려 갈 수 있었습니다.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편에 다들 스페인 간다는 설레임이 가득한 표정인데 저만 깊은 수심에 가득차 있던 기억이 납니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4터미널에서 1터미널로 가서 다시 체크인을 해야했기에 끝까지 안심할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가시방석에 앉아 있듯 긴 시간을 보내고 겨우 카라카스행 비행기에 탑승했을때 비로소 마음을 조금 놓았습니다. 물론 제 통장은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만.
입국할때는 역시나 독재자의 영향인지 심사가 까다로왔습니다. 구글 검색으로 외국인 승객들의 이름을 찾아보더군요. 뭔가 반정부 인사가 있나 살피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다행히(?) 몇년전 낫서울 사진전때 코리아 타임스와 했던 영문 인터뷰 기사가 나와 무사 통과 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 숙소에서 자는둥 마는둥 그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예정대로 카나이마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카나이마 국립 공원. 바로 앙헬 폭포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입니다. 1시간반 정도를 날아 공항이라고 하기에 아주 작은, 런웨이만 존재하는 카나이마에 착륙했습니다. 그곳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5일간의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상황임에도 생각보다는 제법 관광객이 있었습니다. 제가 함께한 그룹도 저까지 14명이나 되었으니 작은 편은 아니었죠. 부자들을 위한 럭셔리 숙소들도 있지만 저는 캠프사이트에서, 해먹에서 자는 투어를 신청해둔 터였습니다. 하지만 함께한 멤버들은 대부분 굉장히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는데요. 사실 이렇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싶은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 대부분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150개국 넘게 여행한 뉴욕의 변호사. 130개국을 넘게 여행한 두바이 사는 부부. 제가 가장 여행을 덜한 사람축에 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달까요.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부의 격차를 느끼기도 했달까.. 뭔가 인생이 다른 것 같아서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을 만나러 온게 아니라 사진을 찍으러 온거니까요. 카나이마 마을에서 나무 보트를 타고 매일 이동하며 이 지역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사실 이곳에 올 때는 오직 앙헬 폭포만 생각했고, 폭포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요. 막상 오고나니 카나이마라는 이 지역의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워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존과 같은 정글에 강이 흐르고 있는데, 유일하게 아마존과 다른 것은 바로 테푸이의 존재입니다. 테푸이는 테이블 마운틴, 그러니까 정상이 평평한 산들을 이르는 현지어로 그들의 말로는 '신들의 집'이라는 뜻이랍니다. 절벽 같은 형태라 사람이 걸어서는 정상에 오를 수 없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은데요. 실제로 보니 옛날 사람들이 숭상했을만 하다 싶은 웅장함과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점점 앙헬 폭포에 가까워지면서 저는 한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폭포가 말라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왜 과테말라에서 제가 갑자기 점프를 해서 베네수엘라에 갔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예정대로 코스타리카까지 내려간 후에 베네수엘라로 가면 거리도 더 가깝고 편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셨을 수 있죠. 사실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랬다면 여정이 훨씬 단순했겠죠. 그래서 처음에는 2-3월에 앙헬 폭포를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다보니 이 지역의 건기가 찾아오면 앙헬 폭포가 말라버린다고 하더군요. 물줄기가 너무 약해지면 사진을 담기에 좋지 않을 것 같아 1월에 가기로 한것입니다. 하지만 12월까지가 우기고 1월부터 건기가 시작이라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막상 도착했는데 폭포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면 어쩌지 하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 갖은 고생을 하며, 2천불을 더 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폭포가 말라 있다면 정말 너무 슬플 것만 같았습니다.
다행히! 폭포의 물줄기는 힘차게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기에 비하면 약하기는 했죠. 우기가 한창일때는 여러 갈래로 물줄기가 내려오기도 하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저는 하나의 물줄기가 쭉 내려오는 그 모습이 더 좋았습니다. 애니메이션 업에서 본 파라다이스 폭포와도 더 닮은 모습이었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 처음 봤을때도 뭉클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았던 모습이었습니다. 새벽에 이미 나와서 촬영을 준비했는데 구름이 많이 끼고 비까지 와서 좋은 사진을 담을 수 없는건가 하고 좌절했었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아침을 먹으러 캠핑장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순식간에 날씨가 좋아졌고 기적처럼 아침 햇살이 딱 폭포 부분을 비추어 주었죠. 구름이 주변을 감싸며 너무나 환상적인 풍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고 여기 오기를 잘했다고 제 자신에게 몇번을 말했습니다. 이 사진을 담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의 많은 아름다움을 담았지만 앙헬 폭포는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대단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앙헬 폭포와 카나이마 국립공원 촬영은 5일만에 끝났지만 저에게는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 온 길에 로라이마 등산을 하기로 했죠. 로라이마 산은 이 지역의 테푸이들 중에 유일하게 등산으로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꼭 사진으로 담고 싶었죠. 카나이마를 떠나 이틀이 걸린 끝에 로라이마 등산의 시작점으로 갈 수 있었는데요. 원래는 거리가 카나이마와 크게 멀지 않아 비행편으로도 갈 수 있었는데 베네수엘라가 요즘 기름값이 오르고, 관광객이 예전같지 않다보니 더이상 그 비행편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우다드 볼리바르라는 고으로 먼저 날아가 거기서 10시간을 차를 타고 내려가는 긴 여정을 거쳐 겨우 등산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등산은 앞서 앙헬 폭포 여정에서 함께한 14명 중에 2명, 벨기에 커플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벨기에 출신으로 3개월 넘게 여행 중인 이 커플은 20대로 아직 혈기왕성한 친구들이었는데요. 잉위라는 남성이 웨딩 사진가로 활동중이라 같은 사진가로 더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에 비해 체력이 딸리다보니 좀 걱정도 되었지만, 정작 그 친구들은 나중에 제 나이를 알고 깜짝 놀라며 많아야 서른살인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역시 백인들은 동양인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그의 여자친구인 야나도 털털한 성격이라 셋이 무탈하게 6일간의 등산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라이마 산 등산은 카나이마 보다도 사람이 많은, 등반객이 북적여서 깜짝 놀랐는데요. 알고보니 브라질 국경과 가까워서 브라질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보아 비스타라는 지역에서 3시간이면 온다고 하네요. 그래서 브라질 단체 등반객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은 오히려 베네수엘라 돈을 안받고 브라질의 '레알'이 통용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제가 7년전 브라질 아마존에 갔을때 들렀던 '마나우스'와도 가깝더군요. 그때 아마 저도 알았다면 여기를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행이라는게 참 어떻게 흘러갈지 모릅니다.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브라질과 가까운만큼 로라이마 산의 끝 부분은 브라질 국경으로 나뉘어지고, 또 다른 옆나라인 구야나와도 공유합니다. 그래서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닿은 포인트도 있어서 거기도 들렀습니다. 하루에 세 나라를 방문할 수 있는 셈이죠. 물론 실제로 '방문'한 것으로 치지는 않았지만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등반 자체는 좀 힘이 들기는 했는데요. 첫 이틀은 로라이마 산 바로 아래까지 가는 과정, 3일째 드디어 급격한 경사를 올라 산 정상에 오르고, 산 정상에서 이틀을 잔 후에 마지막 이틀에 걸쳐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습니다. 사실 몸이 고생한 것에 비하면 풍경은 카나이마가 더 아름다웠다 싶기는 한데요. 로라이마의 매력은 로라이마 자체보다 로라이마 정상에서 본 풍경인 것 같습니다. 산 정상이란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만큼 넓었고, 그 위에서 본 풍경은 <업>의 칼이 사람으로 오해했던 것 같은 그런 독특한 돌들과 지형으로 가득했습니다. 몸이 힘들었던만큼 기억에는 더 오래남을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등산이 끝난 후 수도 카라카스로 돌아와 마지막 이틀을 보냈습니다. 카라카스는 생각보다도 꽤나 모던한 도시였고, 어떤 면에서는 서울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언덕이 많고, 해방촌 같은 동네도 있고, 빌딩들의 모습이 약간 90년대 서울의 풍경과 닮아있었달까요? 비록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관광객이 거의 제로에 수렴해서 그런지 사진을 찍히면 오히려 좋아해주고 반가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또한 얼마 지나면 사라질 모습이겠죠. 그래서 이 순간이 저에게는 오히려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비록 독재자가 꽉 잡고 있지만 베네수엘라라는 나라를 저는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다른 아름다운 지역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언젠가 다시 들리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다시 가고싶은 나라가 너무 많아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베네수엘라 또한 그 긴 리스트에 또 저장해둡니다.
그렇게 베네수엘라를 떠나 다시 보고타를 거쳐 과테말라에 돌아왔습니다. 약 3주만에 다시 왔는데 마치 고향에 온 듯 반갑더군요. 떠나기 전 잠시 스쳐만 갔던 안티구아에 자리를 잡고 과테말라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일 이제 과테말라의 마지막 하일라이트, 아카타넹고 등산을 하러 떠나는데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푸에고 화산을 촬영하기 위해서입니다. 과테말라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용암을 뿜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화산이라 촬영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오늘 듣게 된 소식. 지난 9일간 푸에고 화산이 갑자기 잠잠해졌다고 하네요. 원래는 20분마다 용암을 뿜는데 갑자기 조용해서 전문가들도 의아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 가기 전에 촬영했어야 하나, 이렇게 또 타이밍이 안맞나 싶어 마음이 싱숭생중한데요. 내일 올라가는 동안 침묵을 깨고 용암 분출을 다시 시작해주면 좋겠다 하고 작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꽤나 힘든 등산이라고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카메라 장비 때문에 무거울 수 밖에 없지만 짐을 잘 싸고, 남은 것들은 숙소에 좀 맡겨두고 다녀오려고 합니다. 힘들어도 1박2일 등산이니까 사실 할만은 할 것 같은데.. 역시 문제는 그렇게 갔는데 용암의 분출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이겠죠. 그저 부디 운이 따라주기를 빌며,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나 늦어진 이번 편지에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보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지는 엘살바도르에서 보내게 될 것 같네요. 베네수엘라에서의 우여곡절로 여행비용이 현저하게 부족해진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합니다. 참 오늘이 제가 이번 여정을 시작한 100일째 날이었답니다. 이제 두달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보겠습니다.
2025년 1월30일,
케이채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