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기다린 만남.
지난 메일 후 소식이 또 좀 늦어버렸네요. 온두라스로 가기 전날 밤 글을 썼는데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았죠. 온두라스 국경을 넘는 일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여권을 한참 보던 온두라스 이민국 직원이 제 비자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전혀 예상을 못했기에 무슨 소릴 하는거야 했는데, 문제는 C4-A라는, 과테말라/엘살바도르/온두라스/니카라과 4개국이 공유하는 비자 제도가 문제였습니다. 이 제도에 따라 최대 90일간 이 4개국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인데요. 저는 알고는 있었지만 각 나라 당 90일씩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나라마다 따로 날짜를 준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 사람 말이, 4개국 중에 처음 입국하는 나라에서 적어준 체류일이 전체 4개국 체류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필 베네수엘라 갔다가 과테말라로 입국했을때 공항에서 이상하게도 15일만 날짜를 적어주었더군요. 그래서 온두라스 입국하는 날이 이 체류일이 동이 나는 날이었고, 그래서 저는 날짜가 없으니 입국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와서 과테말라시티로 돌아가 비자 연장신청을 하라는데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리는 이야기라 이걸 어찌해야할지 몰랐습니다.
저의 버스 운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끝에 그는 제가 그냥 입국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요. 저에게 돈을 요구했던 것을 봐서는 관리에게 뒷돈을 찔러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국 도장을 안받았다는 것이었죠. 이걸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온두라스에서는 잘 체크 안하니 니카라과에서 새로 도장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도저히 믿음이 안가더군요. 얼떨결에 그냥 시키는대로 넘어왔는데 생각 하면 할수록 나중에 더 큰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온두라스에서 2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된거 그냥 그때가서 부딛치자 하는 마음으로 잠시 잊고, 처음 도착한 마을, 코판에서 온두라스에서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코판은 온두라스가 자랑하는 유일한 마야 유적지입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코판입니다. 저에게는 무척 의미있는 장소였는데, 바로 30년전 온두라스에서 살았을때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방문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30년만에 다시 가려니 사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30년전에는 입장료 같은 것도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냥 말그대로 널부러져 있는 유적지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출입금지구역도 없고 누구나 유적을 만지고 올라가고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입구에 번듯하게 방문객 센터도 생기고, 입장료도 비싸게 받고, 여러 유적들을 다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두고 햇볕에서 보호하려고 지붕까지 만들어놨더군요. 하긴 30년이란 시간이 얼만데, 그대로인 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죠. 그때 찍었던 몇장의 사진을 폰에 넣어왔는데, 겨우겨우 같은 장소를 찾아 그때와 똑같은(?) 포즈로 기념 사진을 남겼습니다.
코판 마을은 30년전에는 스쳐만 갔었는데요. 작은 마을이지만 무척 정감가는 곳이었습니다. 관광객이 적은 온두라스에 가장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 이곳 코판, 그리고 다이빙으로 유명한 베이 아일랜드인데.. 그런 곳임에도 전혀 관광지 느낌이 없고 현지인들의 삶이 포근하더라고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담았는데 저의 기분 탓일까요, 30년만에 돌아온 저를 환영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제가 이곳에 살았었다는 것을 모를텐데도 말이죠. 사실 온두라스 전국이 다 이런가 하고 신기해할 정도였는데 여행을 다 마치고 보니 시골 마을이라 더 그랬던 듯 합니다. 도시들은 좀 시크한 곳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방으로 내려가면 다들 참 선한 마음을 가졌더군요. 시작부터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코판을 떠나 다음으로 찾은 곳은 그라시아스 렘삐라. 갈까말까 하다가 간 곳인데 온두라스에서 가장 높은 산, 세로 미라스가 있는 곳으로 푸르른 자연으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커피 산지로도 알려진 곳이죠. 이곳은 사실 온두라스에서 갔던 곳들 중에는 가장 인상에 덜 남기는 한 곳인데요. 가장 높은 산에는 안올라가고 등산 코스만 한번 돌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곳은 마을버스를 타고 1시간 동안 내려갔던 작은 마을 라 깜빠라는 곳이었는데, 그 곳의 잔잔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온두라스는 시골들이 다 좋더라고요. 나중에 다시 오는 날이 온다면 시골 마을들만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라시아스를 떠나 찾은 곳은 요호아 호수라는 곳으로 온두라스에서 자연 호수로는 가장 큰 호수라고 합니다. 딱히 관광지는 아니었는데 십수년전에 D&D라는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자 호스텔을 만든 외국인이 있었고, 그 덕분에 배낭여행자들이 종종 들리는 곳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처음에 인터넷으로 정보를 좀 찾아봤을때는 특출나게 아름다운 것 같지 않아 안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꿔 그래도 한번 들러보자 했던 것인데 와보고는 감탄했습니다. 생각보다도 너무 좋았거든요. 호수도 아름다웠고, 호수 주변의 산과 숲도 좋았고, 무엇보다 마을의 사람들이 참 좋았습니다. 온두라스를 다니면서 느낀게 온라인에 정보가 별로 없고, 무엇보다 좋은 사진가들이 별로 들리진 않아서 온두라스를 제대로 표현한 사진이 없어요. 그래서 '볼거 없네' 할 수 있는데 제가 느낀 바로는 중미에서 가장 저평가 된 나라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과테말라에서, 엘살바도르에서, 여러 배낭여행자들을 만났는데요. 온두라스 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죄다 니카라과로 바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나마 온두라스 가는 사람들도 본토는 뛰어넘고 바로 다이빙하러 베이 아일랜드 섬들로 가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엘살바도르로 가던 버스에서 여행자들이 서로 여행 일정을 얘기하며 온두라스를 아무도 안간다는 것을 알고 '다들 온두라스는 스킵하지 하하하' 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요놈들 봐라?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배낭여행자들 마저 아무도 안간다니 내가 꼭 가야겠구나 했죠. 저는 또 30년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꼭 온두라스를 제대로 담아주겠다, 제대로 온두라스를 보여주겠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서도 어디를 갈지 조사하고 했을때는 뭐가 없는 것만 같기도해서 대체 내가 어떤 사진을 담을 수 있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정말 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요호아 호수는 특히 제 마음에 들었던 장소입니다. 주변에서 아름다운 새들을 만나기도 했고, 따뜻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마을의 유일한 스페셜티 커피샵에 갔었는데 여사장님이 영어를 잘하셔서 대화를 해보니 미국 휴스턴의 커피 행사에 갔다가 전주연 바리스타 만났었다고 '모모스 커피 아니?' 하고 물어보셔서 깜짝 놀랐답니다. 온두라스 다녀가셨다고, 코판 유적 보고 갔다고 하시더라고요. 커피 리브레도 온두라스에서 커피 공급받는다고 하셔서 한국 커피가 여기까지 알려져있구나 싶었습니다. 온두라스는 30년전에는 커피가 전무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중미 최대의 커피 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뭐라도 하나 잘되고 있는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온두라스는 중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지만, 부디 더 잘되면 좋겠습니다.
요호아 호수를 떠나 다음으로 들린 곳은 산페드로술라. 일명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제가 살았던 곳, 제가 학교를 다녔던 곳입니다. 저에게는 첫 해외 생활을 했던 곳으로만 기억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십수년 후 이곳이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도시라는 식으로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30년만에 가보니 정말 너무나 많이 바뀌었더군요. 그때는 도시라기엔 부끄러운, 마을 정도의 규모였는데 지금은 완전한 도시였습니다. 그떄보다 두세배 이상으로 커진 것 같았고, 거대한 버스 터미널이 있는 등 아주 발전한 모습이었습니다. 외국인 여행자가 여기 머무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저는 들러야 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모교, 프리덤 하이스쿨을 찾아가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미리 찾아보니 아쉽게도 원래의 위치에서 학교를 옮겼다고 하더군요. 혹시나해서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연락했는데 방문을 환영한다고는 했지만 아무 개인적인 이야기는 없어서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 위치가 다른데 아는 선생님 마저 한 명 없다면 너무 뻘쭘한거 아닌가 싶어 어찌해야하나 했죠.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학교에 도착했는데 과거와 달리 너무나 커진 학교였습니다. 안내를 받아 고등학교 교장실로 갔는데 문이 열리는 순간, 과거 학교 다닐때 스페인 과목 선생님이시던 분이 반갑게 안아주시더군요. 알고보니 그 긴 세월이 흘러 교장 선생님이 되셨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점심 먹자고 하셔서 교장실에서 식사를 하는데 생물 수업을 가르쳐주셨던 젤라야 선생님도 들어오셔서 꼭 껴안으며 재회의 마음을 나눴습니다. 제 예상보다도 좀 더 찡해지는 마음을, 시큰해지는 코를 느꼈습니다. 그 아주 오래전, 1994년에 한국을 처음 떠나서 듣도보도 못했던 온두라스라는 땅에 갑작스레 착륙해 영어도 스페인어도 한마디 못하면서 오직 온두라스인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던 그 시절 생각이 참 많이 났습니다.
30년전 그 시절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다 젤라야 선생님이 내일 뭐하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저는 오늘 라세이바로 가서 다음날 코야스 코치노스라는 섬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아직 어떻게 가는지를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정말 놀랍게도, 선생님이 내일 바로 그 섬을 가신다는거에요. 저의 후배들을 데리고 학교 여행을 가는데 같이 가겠냐고 하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원래 제가 가려고 했던 곳을 선생님과 제 후배들이 같은 날에 가려고 했다니. 이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 오려고 했구나, 이번 중미 여정의 모든 것이 오늘 나를 여기에 오게 하려고 했구나.. 그런 기분이 들었죠. 온두라스 입국시의 스탬프 문제도.. 그렇게 입국한 것은 내가 이 날짜에 여기 왔어야 하기 때문이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달까요. 저는 약간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인데 이날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초대에 응하고 다음날 라세이바에서 만나기로 하면서 반가운 만남을 마쳤습니다.
라세이바는 산페드로술라에서 5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30년전에 한번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시 그때의 기억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었는데요. 대부분 이 도시에 오는 이유는 베이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페리로 두시간여면 로아땅, 혹은 우띨라 섬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띨라 섬은 세계에서 가장 싼 금액으로 다이빙 패디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배낭여행자들이 온두라스를 찾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곳이죠. 저는 30년전에 로아땅에 갔었는데요. 그때는 물은 참 예뻤지만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섬 전체에 호텔이 하나였고 전혀 개발이 안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수십개의 호텔과 리조트가 있고 크루즈 배들이 정박하는 엄청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굳이 이번에는 안가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해서 가고 싶던 곳이 바로 육지에 더 가까운 카요스 코치노스, 11개의 아주 콩알만한 섬들과 2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제도였습니다.
라세이바 도시 근처의 주유소에서 이른 아침 6시에 지나가는 선생님의 차와 접선했는데요. 옛날 생각만하고 학교 여행이라 그래서 학생 2-30명 정도 데리고 가나 했는데 알고보니 80명이 넘는 12학년생들이었습니다. 30년전에는 그게 거의 전교생 숫자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큰 버스와 선생님들 차 세대가 가는데 저는 선생님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해안에 도착해 작은 보트를 타고 한시간 정도 거칠게 바다를 가로질러 카요스 섬들을 방문하고 탐험할 수 있었는데요. 바다의 색도 주변의 풍광도 아름다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가리푸나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가리푸나는 온두라스는 물론 과테말라, 벨리즈까지의 캐리비안 해안가에 분포된 사람들인데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다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로 그들만의 문화와 언어, 음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몇년전 가리푸나 콜렉티브라는 그들의 음악을 담은 음반을 듣고 알게되었는데요. 카요스 코치노스 섬 중 몇곳은 이들이 사는 마을로 되어 있어 그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섬들을 나의 후배들과, 30년전 선생님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여행이 줄 수 있는 경험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죠. 이곳에서 담은 사진들도 마음에 들지만 이 모든 사건들은, 이야기들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저는 온두라스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바다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산속으로, 바로 삐꼬 보니또라는 곳이었는데요. 라세이바는 바다 앞에 있어 바다로 유명하지만, 안쪽에 보이는 산들 또한 유명합니다. 산세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새와 동물들이 있는 것으로 특히 유명한데요. 저는 이곳에서 새들을 만나고자, 무엇보다 러블리 코팅가라고 불리는 희귀한 새를 만나고자 산속의 롯지에서 이틀밤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산속 산장이라 역시나 가격이 좀 비싼 곳이었지만 오직 새를 위해 투자를 했던 것인데요. 여기는 다 좋은데 가이드들이 그렇게 프로페셔널하지 않아 대부분 제가 직접 새를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새를 못볼 것만 같았죠.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코팅가를 두번 만나고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서 찍지 못해 아쉬움은 있지만 볼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놀라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탐조에는 아주 아마추어지만 그래도 사진을 위해 세계 내노라하는 탐조 명소들을 다니며 나름 눈이 조금은 다듬어졌나보다 싶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코앞에 있는 새도 못찾아낼 때가 더 많지만 말이죠.
그렇게 온두라스의 시간을 모두 마치고 저는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니카라과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온두라스 입국할 때의 그 스탬프 문제의 해결을 봐야 할 순간이었죠. 무슨 일이 벌어질까 너무 긴장이 되고 걱정이 많았는데요. 정작 문제는 다른데서 터졌습니다. 한국인으로써 니카라과에 입국하는 것이 더 복잡했던 것입니다. 입국심사를 위해 일주일 전에 써야하는 온라인 신청서가 있는데, 찾아보니 제출했어도 확인도 안한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굳이 안해도 됐다는 사람들이 많아 별 걱정을 안했습니다. 그냥 하루 전날에 작성을 했죠. 그런데 일주일전에 작성을 해야했다며 안된다고 하더군요. 제 직업이 사진가라 그것도 좀 까다롭다고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질 않았지만 안된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일주일 기다려야 입국할 수 있다는데 국경에서 그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국경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엘살바도르로 향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코스타리카부터 가기로 한 것입니다.
코스타리카부터 보고 거기서 니카라과 국경을 다시 넘어보자는 계산이었습니다. 엘살바도르로 향하며 온두라스 국경을 넘게 됐는데 드디어 스탬프 문제를 해결해야할 시간. 그런데 역시 온두라스는 저에게 특별한건지, 담당 직원이 말하더군요. 스탬프가 없으니 너는 300불 벌금을 내야한다. 하지만 지금 내는게 아니라 나중에 온두라스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 납부하도록 해라 라고요. 그러면서 그냥 보내주었습니다. 너무 걱정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잘풀릴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온두라스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너는 내 운명이구나. 그렇게 다시 한번 온두라스를 쓰담쓰담 하면서 떠났습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고 있을 시간은 별로 없었습니다. 베네수엘라 때 마냥 이륙 3시간이 남은 비행기를 예약했고 공항으로 허둥지둥 향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전에는 상상도 안했던 코스타리카에 갑작스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중미 여정의 종착지로 계획했던 곳에 덜컥 먼저 도착해버리니 이 모든 것이 조금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런고로 이 메일은 지금 코스타리카에서 쓰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며 원래도 어렵던 경제가 더 어려워져 지금 사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정보다 더 일정을 빨리 마쳐야 할 확률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던 갈 수 있을 때 까지는 더 가보려고 합니다. 코스타리카에서의 시간을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물가가 너무 비싸 걱정입니다만 다음 메일은 코스타리카를 모두 담아내고 전하겠습니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그래도 기대해주세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만나겠습니다.
2025년 2월27일,
케이채 드림. |